2000. 3. 21. 『문화일보』 28면


<디지털시대 위기의대학>(6)

위기가 아니라 기회다 


 최현미 기자 


  디지털 시대를 맞아 위기에 처한 기초학문이 살아남을 길은 있는가. 기초과학 분야는 응용과학과 접목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면서 상황이 다소 나은 편이지만 인문학의 경우에는 살아남기 자체가 ‘하늘의 별따기’다. 최근 대학가 안팎에서는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이와 관련, 한 인문학 교수가 벤처사업가로서 성공하기까지의 이야기가 주목을 끌고 있다. 그 주인공은 조선후기 향촌사회사를 전공한 중앙대 박경하(사학과)교수. 인문학의 위기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지난 97년 구성된 전국대학인문학연구소협의회 초대 기획간사였던 그가 자칭 ‘디지털의 전도사’로 변신한 사연은 이렇다.


  지난해 1월 중국의 불교유적지를 답사중이던 박교수는 상하이(上海) 남쪽의 시골마을, 그의 말을 빌리자면 ‘깡촌구석’에 VCD(Video Compact Disk) 대여점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중국이 디지털사회로 급속하게 바뀌고 있는 데 따른 충격과 함께 이제 가만히 앉아서 대학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를 탓하기에는 세상이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민끝에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중앙대 창업지원센터에 입주, 지난해 12월 문화포털사이트 ‘잠치닷컴(www.zamchi.com)’을 등록했다. 이달들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잠치’는 문화전문가들의 강의가 진행되는 사이버대학, 전세계 갖가지 페스티벌을 동영상으로 보여주는 페스티바 TV, 사이버미술관, 세계문화원, 고서도서관 등으로 구성돼 있다. 최근 사업설명회를 연 ‘잠치’는 콘텐츠가 뛰어나다는 평가속에 지금까지 40억원 가량의 에인절투자가 줄을 이었다. 박교수는 “이제 지식이 대학과 교수로 상징되는 특정 권력에 속했던 시대는 지났다. 개방성이 특징인 디지털기술은 이런 틀을 깨고 있다”며 “인문학자들도 적극적으로 신기술을 활용, 지식 대중화에 나서야 한다. 훨씬 빠른 시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지식을 전달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디지털시대는 위기가 아니라 기회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에서 이같은 인문지식과 디지털 첨단기술의 결합을 통한 지식 대중화는 이제 막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80년대말∼90년대초 남들이 제대로 알아주지도 않는 가운데 몇몇 선구자들이 그 길을 닦았다. 90년대를 통틀어 우리 사회에 엄청난 문화적 반향을 일으킨 조선왕조실록 CD롬을 만든 김현(연구개발정보센터 정보지원부 부장)씨, 한국 현대시 CD롬을 만든 고려대 김훈규(국어국문과)교수, 17세기 국어사자료를 컴퓨터에 입력해 분석한 단국대 홍윤표(국어국문과)교수 등이 바로 그들. 이를 계기로 90년대말 정보화가 국가적 관심사가 되면서 규장각 고서 전산화나 한글전산화를 위한 ‘21세기 세종계획 프로젝트’ 등과 같은 정부지원의 대형 사업이 시작됐고 최근 벤처의 열풍속에 곳곳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터져나오고 있다.


  특히 인문지식의 대중화는 21세기를 좌우할 최대의 힘으로 꼽히는 창조성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인문지식의 창조적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김현씨의 경우이다. 고려대 철학박사 출신인 그는 박사과정 내내 한문책에 빠져 있다가 어느 순간 정신적 유산이 너무 많아 개인의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한사람의 노력의 결과를 여러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라는 질문이 생겼고 결국 그 답을 ‘컴퓨터’에서 찾기로 하고 85년 한국과학기술원 공학연구소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약 7년간 근무하며 동양관련 문헌의 전산화기술을 개발한 뒤 조선왕조실록 한글판 CD롬 작업에 착수했다. 95년에 나온 이 CD롬은 문화계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으나 해적판이 많이 나돌아 이를 만든 서울시스템은 부도가 났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CD롬이 나온뒤 지금까지 조선왕조와 관련된 책들이 500권 이상 쏟아졌다는 점이다. 이는 조선왕조실록 CD롬이 만든 부가가치라는 것이 출판계의 공통된 평가다. 기초작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 조선왕조실록의 한문 원전 전산화를 위한 기술개발에 전념하고 있는 김씨는 “창의력은 장난스런 상상력이 아니라 깊은 정신적 자산들이 넘치는 곳에서 나온다”며 “학자들은 자신이 쌓은 지식의 결과를 응용할 수 있는 사람에게 공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숱한 연구자들이 이같은 기초작업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조직논리에 따르다 보면 결국 포기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라며 “대학에서 인문학도들에게 학문의 공유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전달해주면 신세대들은 기술접근성이 뛰어나기 때문에 인문지식 공유를 통한 ‘인문학 르네상스’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에 대한 사회의 인식은 매우 낮은 편이다. 고려대 김흥규 교수는 “여전히 인문학은 종이와 연필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정보화는 정신문화의 데이터베이스화 정도보다 컴퓨터 보급대수로 평가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정부가 지난해부터 대대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규장각, 국사편찬위원회, 민족문화추진위원회의 고전자료 전산화작업도 역사기초 전산화라는 점에서 사회적 평가를 받았으나 사실은 고전전산화 작업보다 실업대책인 공공근로사업에 무게가 더 실려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한 관계자는 “지원이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만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작업에 비전문 실업자들을 쓰다보니 아쉬움이 많았다”며 “아직은 우리 사회의 수준이 이 정도”라고 토로했다.


  대학 사회나 인문학자 내부의 인식변화도 아직은 갈길이 멀다. 서울의 모대학 철학과 교수는 “시대는 변했는데 아직도 학문과 제자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는 폐쇄적인 풍토가 만연하고 있다”며 “이런 사람들이 지식의 탈권력을 촉진하는 멀티미디어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